밀려드는 벼, 커지는 정미소
독정리 들판에 소문이 도는 것은 가을바람보다 빨랐다. "독정리로 가야 볏값을 떼이지 않는다." "배병희는 제 논을 파는 한이 있어도 농민 돈은 안 미룬다."
3억 부도의 벼랑 끝에서 제 논을 팔아 볏값을 치러낸 뒤였다. 정미소 마당을 메우던 불안은 단단한 믿음으로 바뀌었다. 입소문은 화성 들녘과 장안면, 우정면, 향남 일대 농가들까지 번져 나갔다.
가을 추수가 시작되자 정미소 앞길은 새벽부터 붐볐다. 벼를 실은 경운기와 트럭이 꼬리를 물고 늘어섰다. 볏가마니는 마당을 채우고도 모자라 논둑길까지 길게 이어졌다.
그사이 농촌 풍경도 달라졌다. 논마다 벼를 베고 탈곡까지 한 번에 끝내는 콤바인이 빠르게 보급되었다. 낫으로 벼를 베어 논바닥에 널어 말리던 풍경은 줄어들었다.
콤바인이 훑고 지나간 자리마다 채 마르지 않은 벼가 마대자루 가득 쏟아져 나왔다. 갓 베어 실려 온 벼는 축축한 물기를 머금은 '물벼'였다.
자루 속에 손을 넣으면 후텁지근한 습기가 느껴졌고 풋내가 올라왔다. 수분율이 25퍼센트를 훌쩍 넘었다.
물벼는 제 숨을 쉬는 곡식이었다. 거두자마자 말리지 않으면 낟알이 품은 열기 때문에 하룻밤 사이에 김이 훅 피어올랐다. 이틀만 그대로 두어도 누렇게 뜨고 곰팡이가 슬었다.
가을비라도 한 줄기 스치면 쌓아 둔 벼가 상할 판이었다. 마당에 멍석을 펴고 볕에 말리는 옛 방식으로는 매일 쏟아져 들어오는 물벼를 감당할 재간이 없었다.

정미소 마당은 아침부터 북새통이었다. 물벼를 실은 트럭들이 입구까지 빽빽하게 들어찼다. 농민들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배 사장, 제발 우리 벼부터 부려 주시오! 자루 속이 벌써 후끈후끈 달아올랐소!" "이거 오늘 안 말리면 일 년 농사 다 버리오! 어서 좀 받아주시오!"
인근 정미소들은 물벼를 감당하지 못해 문을 걸어 잠갔다. 바짝 말려 오지 않으면 받지 않겠다고 내치거나 수매가를 터무니없이 깎았다. 갈 곳 없는 농민들이 독정리로 밀려든 까닭이었다.
맏아들이 마당을 뛰며 마대자루마다 수분측정기를 찔러 넣었다. "아버지, 수분율이 26퍼센트가 넘습니다. 마당에도 더 쌓아둘 자리가 없습니다. 이대로 두면 내일 아침에는 벼가 상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맏아들의 이마에서 비 오듯 땀이 흘러내렸다. 작업복 등판은 쌀겨 먼지와 땀으로 하얗게 절어 있었다. 정미소 일꾼들도 사색이 되어 배병희 곁으로 달려왔다.
"사장님, 더 받으면 큰일 납니다. 비라도 한 방울 떨어지면 수천만 원어치 벼를 고스란히 물어내야 합니다!"
정미소 문을 닫아걸어야 하는가. 벼를 도로 싣고 가라고 등을 떠밀어야 하는가.
흙먼지를 뒤집어쓴 농민들의 눈빛이 배병희의 눈에 밟혔다. 제 논을 팔아서라도 약속을 지켰던 배병희라는 이름 석 자를 믿고 찾아온 이웃들이었다.

배병희는 마대자루를 풀어 벼 한 움큼을 쥐었다. 손바닥에 후텁지근한 열기와 축축한 물기가 묻어났다. 진흙바닥에서 일 년 내내 땀 흘린 사람들의 목숨줄이었다.
"농사지은 사람더러 벼를 도로 싣고 가라는 건 죽으라는 소리다. 우리가 살려내야 한다." 배병희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위기 앞에서 주저앉아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들판이 기계화되었다면 공장도 기계로 맞서야 했다.
"건조기를 들인다. 찔끔찔끔 말리는 작은 기계 말고, 쏟아붓는 대로 다 받아내는 대형 연속 건조기를 놓는다."
배병희는 남은 땅과 자금을 그러모아 결단을 내렸다. 시간당 수십 톤의 벼를 순환시키며 말리는 대형 연속식 곡물 건조기를 들여놓기로 했다. 트럭에서 벼를 쏟아붓는 족족 호퍼에서 건조탑 꼭대기로 퍼 올리는 최신 설비였다.

말린 벼를 보관할 대형 저온 사일로와 저장 창고 부지도 정미소 옆에 닦았다. 남들이 부도 수습에 몸을 사릴 때였지만, 배병희는 한발 앞을 내다보고 움직였다.
공사가 시작되자 배병희와 맏아들은 작업복을 벗지 못했다. 육중한 철골 타워가 마당 한쪽에 우뚝 솟아올랐다. 배병희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버너 배관을 연결하고 열풍 모터를 점검했다.
평생 쇠붙이를 만져온 배병희의 손끝은 대형 기계 앞에서도 거침이 없었다. 볼트 하나, 체인 한 마디의 유격까지 손수 맞추며 윤활유를 쳤다.
하지만 건조기를 세웠다고 끝이 아니었다. 건조기와 승강기가 쉼 없이 돌아가자, 쏟아지는 낟알에서 일어난 왕겨 가루와 먼지가 공장 안을 메웠다. 몇 미터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뽀얀 분진이 차올랐고, 일꾼들은 연신 기침을 뱉어냈다.
배병희는 망설임 없이 대형 집진 설비를 올렸다. 천장 가득 굵은 흡입관을 두르고 강력한 송풍 모터와 여과 필터를 달았다. 공중에 날리는 먼지를 허공에서 빨아들여 바깥 집진실로 빼내는 장치였다.
집진기 스위치를 올리자 공중에 떠돌던 뿌연 볏먼지가 소용돌이를 그리며 배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답답하던 공장 안이 훤하게 트이고, 매캐하던 공기가 가라앉자 일꾼들의 숨통이 트였다.
그 일터의 한가운데에 맏아들이 서 있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 진학 대신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골랐던 맏아들이었다. 이제는 아버지 곁에서 정미소를 떠받치는 가장 든든한 기둥이 되어 있었다.
맏아들은 단순히 힘만 쓰는 일꾼이 아니었다. 물벼가 들어오는 족족 수분율을 꼼꼼히 적고, 건조기의 열풍 온도를 섬세하게 맞췄다. "아버지, 벼를 빨리 말리겠다고 열풍 온도를 50도 넘게 올려 급하게 말리면 낟알에 잔금이 갈 수 있습니다. 도정할 때 쌀알이 덜 부서지려면 45도 아래로 은근하게 바람을 돌려야 합니다."
아들의 말대로 온도를 맞추자 찧어 나온 쌀알에 맑은 윤기가 돌았다. 맏아들은 밤을 새워 제현기 고무 롤러의 틈새를 머리카락 굵기만큼 미세하게 조절했다. 수분율 15퍼센트에 맞춰 말린 벼를 찧어 마대자루에 담았다.
배병희는 새벽녘 기계 앞에 버티고 선 맏아들의 듬직한 등을 바라보았다. 땀에 젖은 아들의 어깨를 말없이 툭 쳤다. 거창한 칭찬은 없었지만, 평생의 가업을 나눌 든든한 동지가 곁에 서 있음을 느꼈다.
건조탑이 묵직한 숨을 몰아쉬며 밤낮으로 돌았다. 축축하던 물벼는 고슬고슬하게 마른 황금빛 벼가 되어 사일로 속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사일로에 가득 찬 벼는 도정기를 거쳐 눈부시게 하얀 쌀이 되어 쏟아져 내렸다. 투명하고 단단한 쌀이 포대마다 차곡차곡 쌓였다.
화물차들이 쌀포대를 싣고 서울과 인천의 양곡 시장으로 쉼 없이 빠져나갔다. 독정 정미소 쌀은 밥맛이 차지고 보관성이 좋다는 입소문이 퍼지며 싣고 가는 족족 팔려 나갔다.
정미소 마당에 모여선 농민들의 얼굴에도 비로소 주름이 펴졌다. "독정리에 가져오면 벼 썩을 걱정이 없어." "배 사장네 건조기를 거치면 낟알 한 톨도 허투루 버리는 법이 없지."
부도의 생채기를 딛고 일어선 정미소는 남양만 일대의 큰 곡물 유통 기지로 우뚝 섰다. 자정이 넘어서야 맹렬하게 돌아가던 건조탑 버너가 숨을 골랐다. 공장의 형광등이 꺼진 뒤에야 배병희는 낡은 작업복 외투를 걸치고 문을 나섰다.
손마디에는 시커먼 기름때와 쇳가루가 깊게 박여 있었고, 며칠 밤을 설친 눈두덩은 붉게 짓물러 있었다. 하지만 발걸음은 모처럼 가벼웠다.
큰 고비를 넘겼으니 이제 한숨을 돌릴 참이었다. 소금 들판을 일굴 때부터 정미소가 위태롭던 나날까지, 평생 남편의 등 뒤를 지켜준 아내에게도 이제는 편안한 쉼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밤바람을 맞으며 들어선 집 안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매일 밤 장작불 연기와 구수한 밥 냄새로 남편을 맞던 부엌 아궁이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안방 문을 조심스럽게 열자 어둠 속에서 밭은기침 소리가 가늘게 새어 나왔다. 얇은 이불 아래 누운 아내의 이마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수십 명 일꾼의 밥상을 차려내며 집안을 건사해 온 아내의 어깨가 눈에 띄게 여위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배병희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 굳어붙었다. 들판을 울리던 기계 소리가 멎은 자리로, 서늘한 밤바람만이 문풍지를 길게 흔들며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