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을 지킨 날 ​

1990년대 중반, 정미소 마당

동트기 전 새벽안개가 정미소 마당을 자욱하게 메우고 있었다. 늦가을 찬바람이 함석지붕 귀퉁이를 훑고 지나가며 덜컹거리는 소리를 냈다. 판자문 틈으로 스며든 찬 공기가 시멘트 바닥을 차갑게 식혔다.


장부를 펼치고 약속한 금액을 맞춰 현금 다발을 준비하는 배병희의 손

나무 책상 위에는 누런 종이 상자 서너 개가 놓여 있었다. 상자 안에는 밤새 준비한 흰 봉투가 빈틈없이 들어차 있었다. 봉투 속 만 원짜리 지폐를 손끝으로 쓸어내리자 빳빳한 종이 질감과 함께 매캐한 인쇄 잉크 냄새가 훅 끼쳤다.

남양만 갯벌의 소금기를 빼내며 십수 년 피땀으로 일군 논이었다. 배병희는 제 살점 같은 그 논 가운데 일부를 헐값에 넘겨 이 돈을 마련했다. 거래처의 연쇄 부도로 떼인 쌀값이 3억 원에 달했지만, 남 탓만 하며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이 돈은 농민들이 봄부터 가을까지 허리를 굽혀가며 거둔 볏값이었다.

날이 밝아오자 신작로 저편에서 자갈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운기 덜덜거리는 소리와 함께 농민들이 하나둘 정미소 마당으로 들어섰다. 낡은 털모자를 눌러쓴 늙은 농부부터 흙 묻은 점퍼를 걸친 청년까지 수십 명이었다.

농민들의 얼굴에는 초조한 기색이 짙게 배어 있었다. 서울의 큰 도매상이 야반도주하고 정미소 금고가 바닥났다는 소문이 온 들판에 파다했다.

사람들은 마당 구석을 서성거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주머니 속에서 구겨진 수매 보관증을 만지작거리는 손끝이 잘게 떨렸다.

"배 사장마저 어음을 내밀면 우린 끝장이야." "일 년 농사지은 볏값을 떼이면 당장 올겨울 식솔들 끼니는 어쩌나."

낮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찬 바람을 타고 마당을 맴돌았다. 누구 하나 선뜻 문을 두드리지 못한 채 불안한 눈길로 사무실 창문만 올려다보았다.

덜컹, 소리와 함께 정미소 판자문이 열렸다.

배병희가 낡은 작업복 차림으로 마당에 나섰다. 그 뒤로 맏아들이 두툼한 수매 장부와 필기도구를 가슴에 안고 따라나왔다. 아내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다란 양은 주전자와 사발들을 들고나와 마당 한편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구수한 보리차 냄새가 차가운 새벽 공기 속으로 번져나갔다. 배병희는 마당 한가운데에 놓인 널찍한 나무 평상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웅성거리던 마당이 일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잠잠해졌다. 배병희는 모자를 벗고 농민들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어르신들, 찬바람 부는데 일찍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차 한 잔씩 드시고 몸부터 녹이십시오." 목소리는 평소처럼 담담하고 고요했다.

맨 앞줄에 서 있던 장안면의 늙은 농부가 주저하며 한 걸음 나섰다. 점퍼 섶을 움켜쥔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배 사장, 서울 쌀가게가 부도를 내고 도망쳤다는 말이 사실이오? 우리 볏값은 어찌 되는 거요? 소문대로 반 토막만 주거나 몇 달 뒤 어음으로 때우는 거요?"

마당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배병희의 얼굴로 쏠렸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배병희는 말없이 평상 위에 놓인 종이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농민들의 이름이 적힌 흰 봉투가 아침 햇살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이 정산하기로 약속한 날입니다." 배병희가 장부를 가리키며 굵직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벼를 맡겨주신 분들의 이름과 수량을 확인하고, 단 한 푼도 깎지 않고 전액 현금으로 치러드리겠습니다."

마당 여기저기서 헉, 하고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배병희는 장부를 펼쳤다. 장부 첫 장에 적힌 마을 어르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불렀다. "독정리 어르신, 삼백이십 가마 대금 구백육십만 원입니다."

이름이 불린 노인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평상 앞으로 다가섰다. 맏아들이 수매증을 받아 숫자를 대조하고 장부에 도장을 찍었다. 배병희는 상자에서 노인의 이름이 적힌 봉투를 꺼내 들었다. 봉투를 열어 금액을 확인한 뒤 노인의 거친 손바닥 위에 빳빳한 지폐 다발을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노인은 손바닥에 얹힌 묵직한 돈뭉치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종이쪽지 어음도, 기약 없는 외상 전표도 아니었다. 은행에서 갓 나온 새 지폐였다.

"배 사장, 이게 정말 다 내 돈이란 말이오? 십 원도 안 깎고 다 준단 말이오?" "약속한 볏값인데 당연히 다 받으셔야지요. 정직하게 농사지으신 볏값입니다."

노인의 벌건 눈시울에 물기가 차올랐다. "자네 논까지 헐값에 팔았다는 소릴 들었네. 그 피땀으로 일군 땅을... 우리 볏값 주려고 팔았단 말인가?"

노인의 목소리가 떨리자 마당에 모여 선 농민들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배병희는 노인의 갈라진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손바닥끼리 맞닿으며 투박한 굳은살의 질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땅은 다시 일구면 됩니다. 하지만 농사지은 사람 볏값은 단 하루도 밀려선 안 됩니다. 저를 믿고 벼를 맡겨주셨는데, 제가 어찌 핑계를 대겠습니까." 배병희는 담담하게 머리를 숙였다. "끝까지 믿고 기다려 주셔서 참말로 고맙습니다."

노인은 지폐 뭉치를 가슴에 품어 안고 끝내 소리 없이 눈물을 훔쳤다.

정산은 쉼 없이 이어졌다. 배병희는 장부에 적힌 농민들의 이름을 한 명도 빠뜨리지 않고 직접 불렀다. 백 가마를 넘긴 대농부터 대여섯 가마를 맡긴 소작농까지 차례대로 평상 앞으로 불렀다.

장안면에서 온 농민을 부르고, 독정리의 이웃들을 차례로 호명했다. "마흔다섯 가마 백삼십오만 원입니다." "열두 가마 삼십육만 원입니다."

맏아들은 장부를 넘기며 셈을 꼼꼼히 확인했고, 배병희는 봉투 속 빳빳한 지폐를 한 장 한 장 세어 농민들의 손에 쥐여주었다. 볏값을 받아 든 농민들은 돈을 쉬이 주머니에 넣지 못하고 두 손으로 받쳐 든 채 연신 고개를 숙였다.

"배 사장, 미안하네. 자네 속이 얼마나 타들어 갔을 텐데, 우리가 의심하고 몰려와서..." "아닙니다. 제때 챙겨드리지 못해 마음고생을 시켜드렸습니다."

정미소 마당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번져 나왔다. 볏값을 받아 쥔 농민들은 마당을 쉬이 떠나지 못했다. 평상 곁을 맴돌며 배병희의 손을 쥐고 또 쥐었다.

점심때가 훌쩍 지나도록 줄은 줄어들지 않았다. 배병희의 허리와 어깨가 뻐근하게 굳어왔지만, 그의 손놀림은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지폐를 세는 손가락 끝에 붉은 인주와 지폐 기름때가 검붉게 묻어났다.


지급을 마친 뒤 현금을 받아든 늙은 농민의 거친 손을 꼭 잡는 배병희

오후 늦게 쌀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 마지막 농민이 평상 앞에 섰다. 작은 논 한 귀퉁이에서 벼 세 가마를 거두었던 홀몸 노인이었다.

배병희는 마지막 봉투에서 지폐 아홉 장을 꺼내 세어 노인의 마른 손에 쥐여주었다. "어르신, 구만 원입니다. 올겨울 따뜻하게 나십시오."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배병희의 거친 손등을 어루만졌다. "자네 같은 사람을 두고 의심을 품었다니... 내가 죽어서도 이 은혜를 잊지 않겠네."

해가 서산 너머로 기울자 농민들이 하나둘 마당을 빠져나갔다. 신작로를 따라 돌아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아침보다 한결 가벼웠다.

정미소 마당에 다시 서늘한 적막이 찾아왔다.

평상 위에는 수북하게 쌓여 있던 돈 상자들이 말끔히 비어 있었다. 남은 것은 농민들의 도장과 손도장이 빼곡히 찍힌 수매 장부와 붉은 인주통뿐이었다.

배병희는 빈 상자를 묵묵히 접어 정리했다. 맏아들이 다가와 낡은 장부를 품에 안으며 아버지의 곁에 섰다. "아버지, 이제 다 끝났습니다."

배병희는 손바닥에 묻은 흙먼지와 인주 자국을 작업복에 쓸어내렸다. 손바닥 한가운데 박인 굳은살이 단단하게 만져졌다. 안면도에서 갯벌 둑을 쌓고, 남양만에서 소금기를 빼내며 얻은 노동의 흔적이었다.

수십 년간 피땀 흘려 일군 논 일부가 남의 손으로 넘어갔다. 금고와 주머니는 텅 비었고, 당장 내일부터 정미소를 어떻게 꾸려갈지 막막한 현실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배병희는 고개를 들어 남양만 들판을 바라보았다. 붉은 저녁노을이 텅 빈 들녘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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