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롱 속 땅문서 ​

1990년대 중반, 독정 정미소

찬바람이 마당을 쓸고 지나가며 얼굴을 쳤다.

마른 흙먼지 사이로 볏짚 부스러기가 어지럽게 날렸다. 볏값을 떼일까 애태우며 서성이던 농민들의 발자국이 흙바닥에 어지러웠다.

배병희는 작업복 깃을 여미며 안채로 향했다.

발끝에 밟히는 흙이 돌덩이처럼 시렸다. 수도권 상회의 3억 원 부도 어음에 창고 털이, 트럭 도난까지 겹쳐 금고는 바닥나 있었다.

신발을 벗고 안방 문을 열자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문갑 곁에 서 있던 아내가 고개를 들었다. 밤을 꼬박 새웠는지 눈가가 붉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내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남편의 굳은 낯빛만 보고도 일이 얼마나 틀어졌는지 짐작한 눈치였다.


수채화로 그린 볏값을 마련하려고 장롱에서 땅문서 봉투를 꺼내는 배병희

배병희는 구석에 놓인 낡은 목제 장롱 앞으로 다가갔다.

장롱 문을 열자 묵은 방습제 냄새가 번졌다. 개어놓은 무명 이불 밑바닥 깊숙한 곳으로 거친 손을 밀어 넣었다.

손끝에 바스락거리는 두툼한 종이 뭉치가 잡혔다.

모서리가 닳아 헤진 누런 서류 봉투였다. 배병희는 숨을 고르며 봉투 안에서 서류 묶음을 조심스레 끄집어냈다.

빳빳한 종이 위에 먹글씨와 붉은 인장이 선명한 남양만 간척 농지 땅문서였다.

1977년 안면도 살림을 정리하고 올라와 정부에서 분양받은 7정보에, 피땀으로 더 사들인 13정보까지 합쳐 일군 6만 평 논이었다.

처음 독정리에 발을 디뎠을 때 이곳은 잿빛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바닷물이 덜 빠져 봄마다 허옇게 소금꽃이 피어올랐고, 어린 모는 짠물에 타죽기 일쑤였다. 배병희는 담수호 물을 끌어와 논을 채우고 빼내는 물갈이를 수천 번 되풀이했다.

장화 속 발이 짓무르고 부르텄다. 흙의 독기를 씻어내 마침내 옥토로 일군 논은 집안의 목숨줄이었다.

새마을정미소를 떠안을 때도 논 일부를 떼어 팔았다.

전봇대를 세워 전기를 끌어올 때도, 비를 가릴 창고를 짓고 길을 닦을 때도 제 살점을 베어내듯 논을 팔아 충당했다.

그렇게 줄이고 줄여 남겨둔 논들이 집안의 마지막 기둥뿌리였다.

배병희는 굵은 손가락으로 땅문서 표면을 쓸어내렸다. 손바닥의 두터운 굳은살이 빳빳한 종이를 스칠 때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땅문서 봉투를 든 배병희와 문간의 직원, 장롱 곁에서 바라보는 아내

드르륵,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사무실에서 뒤따라온 직원이 문지방을 짚고 섰다. 밤새 트럭을 수소문하고 창고를 지키느라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배병희 손에 들린 땅문서를 본 직원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사장님, 그건…… 피땀으로 일군 논 아닙니까. 그 논에 손을 대시면 어떡합니까."

직원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배병희는 종이 표면을 굵은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논이야 흙이지만, 사람은 먼저 챙겨야지."

"하지만 이번 일은 우리 잘못이 아니잖습니까. 서울 놈들이 사기 친 건데 왜 사장님이 논까지 내놓으셔야 합니까."

직원이 울컥하며 말을 쏟아냈다. 배병희는 땅문서를 다시 누런 봉투 속으로 반듯하게 밀어 넣었다.

"남 탓해서 해결될 일 같으면 백 번이라도 남 탓을 하겠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방 안을 묵직하게 울렸다.

배병희는 봉투를 쥔 채 직원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당에 선 사람들 봐라. 일 년 내내 흙 파서 거둔 벼를 나 하나 믿고 넘긴 사람들이다. 그 벼는 저 집들 한 해 양식이고 자식들 학비여. 우리가 문 닫고 도망치면 저 사람들은 어디 가서 하소연하겠냐."

직원은 입술을 깨문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내 논을 파는 한이 있어도, 농사지은 사람 볏값은 밀려선 안 된다."

배병희의 한마디는 쇳덩이처럼 단단했다.

"사람을 오늘만 보고 내일은 안 볼 것처럼 대하면 안 된다. 논은 팔았다가도 다시 일구면 그만이지만, 사람 신용을 잃으면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해."

배병희는 서류 봉투를 품에 안고 방을 나섰다. 문지방 곁에 선 아내가 말없이 그의 옷깃을 여며주었다.

정미소 마당으로 나오자 농민들의 웅성거림이 멎었다. 배병희는 사람들 한가운데로 들어가 누런 봉투를 꺼내 들었다.

"어르신들, 또 형님 아우님들. 서울 상회가 부도난 것도 맞고, 어젯밤 창고 쌀을 털린 것도 사실입니다. 납품 트럭까지 도둑맞았습니다."

농민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배병희는 손을 들어 그들의 동요를 가라앉혔다.

"하지만 걱정들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 계십시오. 제가 가진 간척지 논을 내놓겠습니다. 볏값 치를 돈은 이 논을 팔아서 단 한 푼도 축내지 않고 날짜 맞춰 통장으로 다 넣어 드리겠습니다."

"배 사장, 정말이오? 그 피 같은 논을 판다고?"

마을 어르신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예, 어르신. 정미소 문 안 닫습니다. 내 논을 파는 한이 있어도, 이웃들의 피땀 어린 볏값은 단 하루도 미루지 않습니다. 그러니 염려 마시고 돌아가십시오."

"배 사장이 저리 말하니…… 믿고 기다려 봅시다."

어르신 몇 분이 다가와 그의 손을 맞잡았다. 농민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하나둘 마당을 빠져나갔다.

사람들이 모두 흩어진 뒤, 배병희는 멈추어 선 도정 설비 쪽으로 걸어갔다. 두툼한 손바닥으로 차갑게 식은 기계 몸체를 쓸어내렸다. 손바닥의 굳은살 위로 쌀가루가 묻어났다.

볏값을 치르기로 한 날은 바로 오늘이었다.

배병희는 봉투를 품속 깊이 갈무리하고 자전거를 끌어냈다. 사립문을 나서자 서릿발 같은 바람이 귓전을 스쳤다. 그는 신작로를 내달려 읍내 복덕방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자 복덕방 주인이 연탄난롯가에서 고개를 들었다.

"어이쿠, 배 사장님 아니시오. 이 추운 날 어쩐 일이십니까?"

배병희는 말없이 품에서 누런 봉투를 꺼내 탁자 위에 얹었다.

"독정리 간척지 논이오. 당장 현금으로 살 사람을 찾아주시오."

복덕방 주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봉투를 집어 들었다. 남양만 일대에서 벼가 잘 되기로 소문난 알짜배기 논이었다.

"배 사장, 이 아까운 논을 왜 내놓소? 게다가 당장 현찰이라니요. 급매로 넘기면 제값의 반 토막도 못 건집니다!"

"제값 따질 시간 없소."

배병희의 눈빛에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늘이 농민들 볏값 치르는 날이오. 은행 문 닫기 전에 대금을 다 치를 사람이어야 하오. 헐값이라도 좋으니 그런 사람을 찾아주시오."

복덕방 주인은 그의 완강한 기세에 혀를 내둘렀다. 서둘러 다이얼 전화기를 돌려 읍내 유지들과 땅을 노리던 이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몇 통의 전화 끝에 평소 그 논을 사겠다고 하던 사람이 돈을 마련해 오겠다는 답을 보냈다. 배병희는 봉투를 앞에 놓고 기다렸다.


중개인과 매수인 앞에서 논 매매 서류에 도장을 찍는 배병희

매수인이 도착하자 논의 매매 대금과 지급 조건을 적은 계약서가 탁자 위에 놓였다. 평생 땀 흘려 가꾼 옥토 일부를 시세보다 턱없이 낮은 값에 넘기는 거래였다. 배병희는 도장에 인주를 묻혀 계약서 아래쪽에 찍었다.

묵직한 도장이 종이를 누르는 순간 손끝으로 서늘한 한기가 번졌다. 생살을 떼어내는 쓰라림이 스쳤지만 그의 손가락 하나 떨리지 않았다.

조건은 하나, 그날 은행 영업이 끝나기 전에 매매 대금 전액을 입금하는 것이었다.

배병희는 복덕방 전화기로 정미소에 연락했다. 맏아들에게 수매 장부와 농민들의 입금 계좌를 챙겨 은행으로 나오라고 일렀다.

오후가 되어 매수인과 함께 은행에 도착했을 때, 맏아들은 대기석에 앉아 장부를 펼쳐놓고 있었다.

배병희는 아들 옆에 앉았다. 누구네 집 벼 몇십 가마, 얼마. 맏아들이 장부의 숫자를 부르면 배병희는 입금할 명단과 금액을 한 줄씩 짚었다.

단 십 원 한 푼 깎지 않은 볏값이었다. 농민의 이름 옆에는 돈을 보낼 은행과 계좌번호가 나란히 적혀 있었다.

맏아들이 마지막 장까지 대조하고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 빠진 분 없습니다."

배병희는 대답 없이 거친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손톱 밑에는 아침에 기계를 쓸어내릴 때 묻은 쌀가루가 남아 있었다.

잠시 뒤 창구 직원이 논 판 대금의 입금을 확인해 주었다. 배병희는 통장에 찍힌 액수를 내려다보았다. 평생 일군 논을 내주고 바꾼 돈이었다.

그는 통장과 정산 명단을 나란히 창구 안으로 밀어 넣었다.

"여기 적힌 분들 통장으로, 적힌 금액 그대로 넣어주시오."

창구 직원이 첫 번째 이름을 확인했다. 배병희는 장부를 편 채 그 앞에 앉았다.

아침에 마당에서 한 약속을 지킬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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