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만 평의 약속 ​

2000년대 ~ 2010년대, 독정 RPC

2000년대에 들어서자 들판의 처지가 달라졌다. 1960년대 안면도 갯벌과 1970년대 남양만에서는 쌀 한 톨이 곧 목숨이었고, 하얀 쌀밥 한 그릇 배불리 먹는 게 평생소원이었다.

하지만 식탁이 바뀌었다. 빵과 고기가 밥상을 채우며 사람들은 밥을 덜 먹었다. 쌀 소비량은 해마다 가파르게 줄어들었다.

쌀이 귀하던 시대는 끝나고 남아도는 시대가 왔다. 정부 창고마다 묵은 벼가 쌓여갔고, 가을마다 쏟아지는 햅쌀은 갈 곳을 잃었다.

시장에는 헐값 경쟁이 번졌다. 어떻게든 버티려는 정미소들은 묵은쌀을 섞은 혼합미를 내돌렸고 너도나도 값을 후려쳤다. 벼를 많이 사들여 많이 찧기만 하면 남던 시절은 끝났다. 볏값은 곤두박질쳤고 문 닫는 방앗간이 속출했다.

독정 정미소 사무실도 살얼음판이었다. 중간 상인들의 독촉 전화가 연일 울렸다. "배 사장, 값을 낮춰주지 않으면 다른 방앗간 쌀을 떼다 쓸 수밖에 없소." 대놓고 덤핑을 요구하는 으름장이었다.

가격을 낮추려면 농민들에게 줄 볏값을 깎아야 했다. 하지만 배병희는 고개를 단호히 내저었다. "농사지은 사람 볏값을 후려쳐서 장사할 수는 없다."

곁에 선 아들들이 마주 보았다. 서울 대기업에서 유통을 익히고 돌아온 둘째 아들이 장부를 덮으며 말했다. "출혈 경쟁에 말려들면 우리도 농민도 망합니다. 밥상 위의 눈높이가 달라졌습니다. 양이 아니라 밥맛으로 승부해야 합니다."

농대를 나와 농협에서 일했던 셋째 아들이 종자 포대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종자기사 자격을 갖춘 셋째 아들이 말했다. "종자부터 바꿔야 합니다. 밥맛만 월등하면 소비자는 돈을 더 주고라도 삽니다. 기르기 까다롭더라도 진짜 맛있는 쌀을 심어야 합니다."

셋째 아들이 내민 것은 쓰러지기 쉬워 기피하던 고시히카리와 찰기 넘치는 백진주였다. "남양만 농가들과 계약을 맺고 이 벼들을 재배해야 합니다."

고품질 품종으로 계약재배를 넓혀가는 일이었다. 소문이 퍼지자 이웃 농민들이 정미소 마당으로 몰려왔다. 진흙 묻은 장화를 신은 늙은 농부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배 사장, 고시히카리는 키가 커서 태풍 한 번 오면 논바닥에 죄다 드러눕는 벼요! 농사 망치면 그 손해를 뉘라서 책임질 거요?"

익숙한 농사를 버리고 생소한 볍씨에 한 해 생계를 거는 일이었다. 농민들의 불안과 불신으로 마당이 들끓었다.

배병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셋째 아들이 가져온 볍씨를 한 줌 쥐고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 "어르신들, 저 배병희입니다."

들끓던 마당이 일순 조용해졌다. 안면도에서 건너와 남양만 짠물 들판을 함께 일군 지 오래였다. "싸구려 쌀로 제 살 깎아 먹으며 버틸 수는 없습니다. 밥맛 좋은 쌀을 제대로 길러내야 농사지은 분들도 제값을 받습니다."

배병희는 맨 앞 농부의 거친 손을 끌어당겨 볍씨를 쥐여주었다. "농사 망칠까 봐 걱정되십니까. 만에 하나 태풍에 벼가 쓰러지거나 소출이 덜 나와도 걱정 마십시오. 계약한 볏값은 제가 낟알 하나 빠짐없이 다 쳐드리겠습니다."

농민들이 술렁거렸다. 배병희의 목소리가 마당에 묵직하게 깔렸다. "제가 부도를 맞았을 때도 땅문서를 꺼내 내 논을 팔았습니다. 단 한 번이라도 여러분 볏값을 떼먹은 적이 있습니까. 제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여러분이 흘린 땀의 대가는 제가 책임집니다."

'내 논을 파는 한이 있어도 농민 볏값은 밀리지 않는다.' 늙은 농부들이 마른 침을 삼켰다. "배 사장이 그렇게까지 나온다면…… 우리가 믿고 심어보겠소."

약속이 맺어지자 일은 거침없이 나아갔다. 셋째 아들은 친환경 영농조합법인을 세우고 우량 볍씨를 소독해 공급했다. 친환경 비료를 보급하고, 논마다 물 대는 시기와 거름 주는 요령을 적은 일지를 들고 들판을 돌았다.

그사이 배병희와 맏아들은 공장 설비를 뜯어고치는 일에 매달렸다. 당시 정부는 나랏돈을 들여 농협 중심의 대규모 미곡종합처리장(RPC)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독정 정미소는 이번 시설을 정부 지원금 없이 자체 자본으로 조성했다.

"남의 돈에 기대면 공장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우리 힘으로 일어서야 진짜 우리 기술이 된다." 배병희는 자체 자본만으로 승부를 걸었다. 낡은 창고 자리에 온도를 15도 이하로 유지하고 습도를 관리하는 거대한 저온 저장 창고를 세웠다.

맏아들은 작업복을 입고 밤낮없이 설비를 조립했다. 미세한 돌을 털어내는 정밀 석발기, 변색된 낟알을 골라내는 색채선별기, 먼지를 줄이는 밀폐형 집진 라인이 공장 안에 들어찼다.

2003년, 까다로운 시설 기준을 통과한 독정 정미소는 나랏돈 한 푼 받지 않고 순수 자체 자본으로 일군 '민간 자체 조성 미곡종합처리장(RPC)' 승인을 얻었다. 새마을정미소를 인수한 지 꼭 20년 만이었다.

길은 바다 밖으로도 뻗어나갔다. 2009년, 추청 품종의 화성시 대표 브랜드 '햇살드리' 쌀 5톤을 말레이시아로 처음 실어 보냈다. 이후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두바이,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4개 대륙으로 우리 쌀 수출길을 열었다.

훗날에는 향이 좋은 쌀도 판로를 넓혔다. 구수한 누룽지 향이 나는 골든퀸3호 품종의 쌀이 '수향미'라는 이름으로 팔렸다. 가을이 깊어가자 낟알이 옹골차게 찬 이삭들이 누렇게 고개를 숙였다.

맏아들이 스위치를 올리자 도정 라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가공 공정을 도맡은 넷째 아들이 선별기와 도정 라인을 정밀하게 맞추자, 서늘한 저온 저장 창고에서 나온 벼가 왕겨를 벗고 잡티 하나 없는 뽀얀 옥빛 쌀알이 되어 쏟아졌다. 자루에 담긴 쌀에서 피어오르는 구수한 냄새에 일꾼들도 연신 감탄했다.


수채화로 그린 화성 햇살드리 제품 포대와 팔레트의 출하 준비를 확인하는 독정RPC 일꾼

시장에서도 호응이 컸다. 밥을 안치자마자 온 집안에 구수한 향이 진동했고, 식어도 윤기가 마르지 않는 차진 밥맛에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백화점과 대형 마트 매대에 올리기 무섭게 쌀 포대가 동났다. 큰며느리가 전한 정직한 생산 일기에 소비자들이 호응했고, 막내아들이 여러 디지털 플랫폼에 열어둔 판매 채널을 통해서도 전국 각지의 주문이 쏟아져 들어왔다.

"쌀이 모자라 못 팝니다!" 주문 전화와 온라인 결제가 밤낮없이 빗발쳤다. 약속은 빈말이 아니었다. 고시히카리와 백진주, 수향미를 심었던 농가들은 일반 벼보다 훨씬 웃도는 값을 손에 쥐었다.


수채화로 그린 계약재배 들판에서 익은 벼를 함께 살피는 농민들

소문은 이웃 면과 읍으로 퍼져나갔다. 장안면과 향남읍 일대에서 계약재배에 손을 잡겠다는 농가가 줄을 이었다. 계약에 참여한 농가는 500여 곳, 재배 면적은 300만 평에 이르렀다. 여의도의 세 배가 넘는 너른 들판이 하나의 약속으로 묶였다.

가을마다 수십억 원의 볏값이 오갔지만, 배병희는 단 하루도 약속한 날을 넘기지 않았다. 볏가마를 가득 실은 트럭들이 정미소 앞마당을 길게 메웠다.


수채화로 그린 공장 일을 마친 뒤 책을 펴고 공부하는 맏아들

맏아들의 만학도 그 세월에 남았다. 어느 봄날, 맏아들이 학사모를 품에 안고 마당에 들어섰다. 마흔다섯의 나이에 한국농업대학(현 한국농수산대학교)에 들어갔던 맏아들이었다. 젊은 학생들 틈에서 뒤처지지 않으려고 강의를 빠짐없이 녹음해가며 밤을 지새워 공부했던 맏아들의 손에 총장상이 들려 있었다.

"아버지, 무사히 마쳤습니다." 맏아들이 졸업장과 상장을 내밀었다. 배병희는 누런 종이를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어린 시절 책보 대신 지게를 져야 했고, 보통학교 문턱조차 밟지 못해 평생 배움의 아쉬움을 안고 살았던 그였다.

배병희는 말없이 맏아들의 넓은 등을 투박한 손으로 두드려주었다. 탁, 탁. 세월이 흐르며 정미소 풍경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무거운 가마니를 어깨에 메고 숨을 헐떡이던 자리에는 쌀자루를 번쩍 들어 팔레트에 쌓는 로봇 팔이 매끄럽게 움직였다. 들판 위로는 농업용 드론이 날아올라 벼의 생육을 살폈다.

해 질 무렵, 배병희는 거대한 저온 저장 창고 앞에 섰다.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갯바람이 하얗게 센 귀밑머리를 스쳤다. 지평선 너머로 300만 평의 너른 들이 붉은 노을 속에 잦아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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