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인 3억

1990년대 초 · 독정 정미소

떼인 3억 ​

수채화로 그린 텅 빈 창고와 부도 수표 앞에 앉은 배병희

1980년대 후반, 독정 정미소는 전동화 설비를 갖추고 창고를 새로 올렸다. 단순한 삯가공을 넘어 농가에서 벼를 직접 사들여 가공하는 상업 도정으로 사업 규모를 한껏 키워가고 있었다.

갓 찧어낸 쌀은 인천과 서울의 대형 도매시장으로 쉼 없이 팔려 나갔다. 겉으로는 번창하는 듯 보였으나, 당시 곡물 유통 시장의 속사정은 살얼음판이나 다름없었다.

현금 대신 몇 달 뒤에나 결제되는 약속어음과 당좌수표가 오가는 외상 거래 관행이 뿌리 깊던 때였다. 쌀 한 가마에 몇만 원 하던 1990년대 초반, 3억 원은 나락 수천 가마 값에 맞먹는 큰돈이었다.

정미소는 물론 온 집안 살림까지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는 액수였다.

가을 수매를 앞둔 어느 날, 배병희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수도권의 대형 곡물 상회가 쌀값 3억 원을 치르지 못한 채 문을 닫아걸고 야반도주했다. 오랜 세월 독정 정미소의 쌀을 도맡아 사 가며 신용 좋기로 이름났던 곳이었다.

불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둑이 터지듯 연쇄 부도가 일어나, 그 상회와 얽혀 있던 중간 상인들까지 줄줄이 쓰러졌다.

배병희가 받아둔 약속어음과 수표마다 은행 창구에서 붉은 부도 도장이 찍혀 돌아왔다. 금고에 넣어 두었던 수억 원짜리 종이들이 하룻밤 사이에 휴짓조각이 되어 버렸다.

돈을 잃은 것도 뼈아팠지만,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이 배병희의 가슴을 더 깊이 찔렀다.

형님 아우 하며 한 밥상에서 밥을 먹고, 땀 흘려 찧은 쌀을 서로 믿고 주고받던 거래처였다. 돈보다 사람 사이의 믿음을 귀하게 여겨 온 그였기에 상처는 더 깊었다.

평소 집안에서는 큰소리 한번 내지 않고 늘 덤덤하던 배병희였다. 그런 그가 사무실 문을 걸어 잠그고 수화기를 붙든 채 목에 핏대를 세우며 분통을 터뜨렸다.

배병희는 부도 수표 뭉치를 낡은 가죽 가방에 챙겨 넣고 서울 영등포와 청량리, 인천의 양곡 골목을 샅샅이 누볐다. 야반도주한 이들의 연고지와 친인척 집까지 비를 맞아가며 찾아다녔다.

하지만 어디를 가나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그처럼 돈을 떼인 채권자들의 아우성만 가득했다. 단 한 푼도 건질 길이 없었다.

연쇄 부도로 휘청거리던 정미소에 도난 사고까지 잇따랐다.


수채화로 그린 도난 뒤 벽이 뚫리고 쌀이 사라진 창고를 마주한 배병희

어느 캄캄한 밤, 도둑들이 정미소 뒤편 곡식 창고 벽을 뚫고 침입했다. 창고 가득 쌓아두었던 쌀 수백 가마를 마당에 세워둔 화물 트럭에 몽땅 싣고 어둠 속으로 달아나 버렸다.

이튿날 아침 배병희는 뻥 뚫린 창고 벽과 트럭마저 사라진 빈 마당을 마주했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번 기막힌 일이 터졌다. 간신히 마련한 쌀을 싣고 서울로 배달을 나갔던 날이었다.

주린 배를 채우려 트럭을 길가에 세워 두고 식당에서 늦은 밥 한술을 뜨고 나왔다. 그 짧은 사이에 쌀을 실은 트럭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트럭 두 대와 창고의 쌀을 연거푸 도둑맞고 연쇄 부도까지 겹치자, 배병희는 그야말로 손발이 다 묶인 처지가 되었다.

정미소 금고는 바닥을 드러냈다. 야속하게도 가을 수확기는 어느덧 코앞으로 다가왔다.

농민들에게 볏값을 치러야 할 날짜가 하루하루 목을 죄어왔다. 흉흉한 소문을 들은 동네 농민들이 하나둘 정미소 마당으로 찾아와 불안한 얼굴로 서성였다.

1983 독정 정미소 · 17화

떼인 3억

배병희 자전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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