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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소금기 밴 6만 평
내 논을 파는 한이 있어도
10화 소금기 밴 6만 평
1977년 · 화성 독정리
화성군 장안면 독정리의 새 보금자리는 정부에서 분양받은 열여덟 평 남짓한 시멘트 기와집이었다.
배병희는 노모와 아내, 어린 네 남매를 데리고 이곳에 짐을 풀었다.
방은 세 칸, 아궁이도 셋이었다.
벽이 얇아 겨울이면 외풍이 매서웠다.
식구가 많아 집은 늘 비좁았다.
그래도 사립문 밖으로 펼쳐진 들판만큼은 아득히 넓었다.
분양받은 농지는 7정보(약 2만 1천 평)였다.
여기에 안면도에서 김 일을 정리하며 마련한 돈으로 13정보(약 3만 9천 평)를 더 사들였다.
모두 20정보, 6만 평에 이르는 갯벌 들판이었다.
하지만 간척지는 쉽게 곁을 내주지 않았다.
1973년 남양방조제가 바다를 막으면서 새로 생긴 땅이었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흙 속 깊이 소금기가 배어 있었다.
조금만 가물어도 논바닥이 거북등처럼 갈라지며 하얗게 소금기가 피어올랐다.
갯바람이 세차게 불면 마른 흙먼지가 눈을 찔렀다.
이주 첫해, 손으로 일일이 심은 어린 모는 짠물을 이기지 못했다.
붉게 말라 버리거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물 위로 둥둥 떠올랐다.
벼 뿌리가 썩어 들어갔다.
배병희가 밤낮없이 매달린 일은 물 관리였다.
남양호와 수로에서 민물을 끌어와 논에 가득 채운 뒤 흙 속의 소금기를 우려냈다.
물꼬를 터 짠물을 배수로로 빼내는 물갈이를 쉬지 않고 되풀이했다.
물길을 고치고 흙을 갈아엎으며 바다가 남긴 소금기를 한 뼘씩 밀어냈다.
6만 평이나 되는 논은 식구들 손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모내기철이면 동네 일손이 다 나와도 모자랄 판이었다.
배병희는 품앗이에 더해 품삯을 주고 일손을 모았다.
형편이 어렵거나 갓 이주해 살길이 막막한 집을 먼저 찾아가 일을 청했다.
품삯은 그날그날 현금이나 쌀로 넉넉히 셈해 주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늘 따뜻한 밥부터 배불리 먹였다.
논두렁에 둘러앉아 함께 밥을 먹는 사이, 낯선 타향의 이웃들과도 차츰 말을 트고 지내게 되었다.
안면도에서 싣고 온 경운기와 탈곡기, 바인더도 제 몫을 톡톡히 했다.
배병희는 조카와 고향 동료들, 화성에서 새로 만난 이웃 농민들과 탈곡팀을 꾸려 들판을 누볐다.
탈곡팀은 일손이 모자란 이웃 농가에도 찾아가 벼를 베고 낟알을 털었다.
몇 해에 걸친 개간과 물 관리 끝에 소금기만 서걱거리던 6만 평 들판은 옥토가 되었다.
가을이면 황금 물결이 출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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