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나도

어스름이 내릴 무렵 경기도 화성 남양만 들녘이 붉은 노을로 물든다. 팔순의 배병희는 독정 RPC 마당에 홀로 서서 아득하게 펼쳐진 황금빛 지평선을 바라본다.
40여 년 전 소금기가 하얗게 버석거리던 척박한 땅에 들어와 피땀으로 일군 간척지. 그 들판 위에 저온 저장 사일로가 우뚝 솟아 있고, 스마트 공장에서는 설비들이 분주히 돌아간다.
안면도 갯벌에서 어린 어깨로 지게를 지던 소년 시절부터 백발이 성성한 오늘에 이르기까지. 굽이굽이 지나온 80여 년이 눈앞을 스쳐 간다.
“사람을 오늘 보고 내일 안 볼 것처럼 대하지 마라.”
봄밤 헛간에서 몰래 볍씨를 퍼 담던 이웃을 모른 척 눈감아주었다. 찾아온 누구에게나 따뜻한 밥 한 그릇을 아낌없이 내어주었다.
장대비 쏟아지는 날 도랑과 진흙탕에 빠진 이웃의 농기계를 제 일처럼 끌어내 주었다. 그는 평생 그 한마디대로 살았다.
먼저 간 아내는 매캐한 연기를 마셔가며 하루에도 몇 번씩 가마솥 밥을 지었다. 일꾼들의 허기를 채우고 가정을 든든히 지켜주었다. 그는 지금도 그런 아내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다.
하지만 자식들이 저마다 어질고 바르게 자라주었다. 아버지의 우직한 성실함을 물려받아 가업을 키워냈다.
그렇기에 그의 황혼은 서글픔 대신 깊은 보람과 평온으로 물든다.
만약 다시 젊은 날로 돌아간다면 어떤 길을 걷겠느냐는 물음에 배병희는 주저 없이 답한다.
“다시 태어나도 나는 흙을 일구고 정미소 일을 하겠다.”
흘린 땀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흙과 곡식은 정성을 쏟은 만큼 돌려준다. 평생을 걸고 그것을 확인했기에 그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다.
독정리의 너른 들녘에는 오늘도 황금빛 나락들이 바람결에 누워 익어간다. 그 곁에서 자식들이 아버지가 걸어온 길을 따라 땀 흘려 일한다.
거친 파도와 모진 세월을 건너온 배병희는 다음 세대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늘 건강하게 살아라. 맡은 일에 성실해라. 그리고 곁에 있는 사람을 언제나 귀하게 여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