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기 밴 6만 평

1977년 · 화성 독정리

소금기 밴 6만 평 ​

수채화로 그린 간척지 물길을 돌보며 소금기를 빼는 배병희

화성군 장안면 독정리의 새 보금자리는 정부에서 분양받은 열여덟 평 남짓한 시멘트 기와집이었다. 배병희는 노모와 아내, 어린 일곱 남매를 데리고 이곳에 짐을 풀었다.

벽체가 얇은 집은 겨울이면 외풍이 매서웠다. 방 두 칸에 온 식구가 옹기종기 칼잠을 자야 할 만큼 비좁았다. 그러나 사립문 밖으로 펼쳐진 들판만큼은 아득히 넓었다.

분양받은 농지는 7정보(약 2만 1천 평)였다. 여기에 안면도의 김 사업과 전답을 정리한 돈으로 13정보(약 3만 9천 평)를 입찰로 더 사들였다. 합치고 보니 20정보, 6만 평에 이르는 광활한 갯벌 들판이었다.

하지만 간척지는 그리 쉽게 품을 내어주지 않았다. 1973년 남양방조제가 바다를 막으면서 새로 생긴 땅이었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은 흙은 속 깊숙이 소금기를 머금고 있었다.

조금만 날이 가물어도 논바닥이 거북등처럼 쩍쩍 갈라지며 하얗게 소금기가 피어올랐다. 갯바람이라도 세차게 불어닥치면 메마른 흙먼지가 눈을 찌르듯 휘날렸다.

이주 첫해, 독정리 들판에 손으로 일일이 심은 어린 모는 짠물을 이기지 못했다. 붉게 말라비틀어지거나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물 위로 둥둥 떠올랐다. 애써 심어놓은 벼 뿌리가 썩어 들어가자, 배병희는 탄식하는 대신 장화를 고쳐 신고 논두렁으로 내달렸다.

그가 밤낮없이 매달린 일은 오직 물 관리였다. 인근 남양호와 수로에서 민물을 넉넉히 끌어와 논에 가득 채운 뒤 흙 속의 소금기를 우려냈다.

이어 물꼬를 터 짠물을 배수로로 빼내는 물갈이 작업을 쉼 없이 되풀이했다. 물길을 정비하고 흙을 갈아엎으며, 바다가 남긴 소금기를 한 뼘씩 밀어냈다.


수채화로 그린 독정리 논둑에서 일꾼들에게 따뜻한 밥을 나누는 배병희

6만 평이나 되는 논은 식구들 손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모내기철이면 온 동네 일손이 다 나와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배병희는 마을 주민들과 품앗이를 나누는 데 그치지 않고, 품삯을 주고 이웃들의 일손을 널리 모았다. 그는 형편이 어렵거나 갓 이주해 생계가 막막한 농가를 먼저 찾아가 일을 청했다.

품삯은 그날그날 현금이나 쌀로 넉넉하게 셈해 주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늘 따뜻한 밥을 배불리 먹이며 일꾼들을 가족처럼 대했다.

논두렁에서 함께 밥을 먹고 품삯을 꼬박꼬박 받으면서, 낯선 타향살이에 서먹하던 이웃들도 차츰 마음을 열었다.

안면도에서 트럭에 싣고 온 10마력 경운기와 탈곡기, 바인더도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배병희는 사촌과 고향 동료들을 비롯해 화성에서 새로 뜻을 모은 이웃 농민들과 함께 탈곡팀을 꾸려 들판을 누볐다.

자기 논의 수확에만 머물지 않았다. 타작 일손이 부족해 발을 동동 구르는 인근 농가들을 찾아가 벼를 베어주고 낟알을 시원스레 털어주었다.

그는 농기계를 야무지게 다뤘고, 고장 난 부품도 현장에서 바로 고쳐냈다. 일꾼을 배려하는 인심도 넉넉했다. 주민들은 그런 그를 믿게 되었다. 이주민이라는 보이지 않는 벽도 흙투성이 논밭에서 자연스레 허물어졌다.

몇 해에 걸친 개간과 물 관리 끝에, 소금기만 서걱거리던 6만 평 갯벌 들판은 옥토로 거듭났다. 가을이면 황금 물결이 출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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