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 선 탈곡기를 돌려라

1970년대 초, 배병희의 아버지는 소금을 굽는 일에 뛰어들었다. 바닷가에 무쇠솥과 철판을 걸고 바닷물을 끓여 졸이는 전통 자염(煮鹽) 방식이었다.
소금을 얻기 위해서는 며칠 밤낮으로 불을 지펴야 했다. 아버지는 땀과 그을음투성이가 된 얼굴로 아궁이에 연료를 밀어 넣었다. 배병희 역시 불 곁에서 일손을 보탰다.
그러나 바닷물을 졸이는 데 연료비와 운반비가 너무 많이 들었다. 소금을 거두어 팔아도 연료비조차 건지지 못했고, 결국 큰 빚만 남았다.
일을 접고 허탈해하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배병희는 오래 잊지 못했다.
아무리 땀 흘려 일해도 비용과 수지를 꼼꼼히 따지지 않으면 헛수고라는 것을, 그는 그때 배웠다.
그동안 수산물과 밭작물을 팔아 모은 돈은 농기계를 들이는 밑천이 되었다. 1970년대 초반만 해도 농촌에서는 대개 도리깨로 낟알을 털었다.
가을이 되면 베어둔 볏단을 마당에 쌓아두고 타작 일손이 부족해 애를 태우는 농가가 많았다.
배병희는 소형 디젤 발동기와 탈곡기를 장만했다. 그리고 사촌들을 비롯한 마을 청년들과 6인 1조의 이동식 탈곡팀을 구성했다. 소가 끄는 우마차에 기계를 싣고 농가를 찾아가 벼를 털어주는 방식이었다.

발동기 평벨트가 탈곡기를 돌리면 일꾼들이 손발을 맞춰 볏단을 날라 넣었다. 낟알이 순식간에 쏟아져 내렸다. 며칠이 걸리던 타작을 반나절 만에 끝내자 농민들의 호응이 대단했다.
탈곡팀은 품삯으로 현금 대신 갓 타작한 벼를 받았다. 하루 작업이 끝나면 배병희는 거둔 벼를 저울에 달아 일꾼들에게 일한 만큼 나누어주었다. 자기 몫으로 뗀 벼는 모아 두었다가 다음 기계를 사고 일을 넓히는 데 보탰다.
우마차 탈곡단이 성과를 냈지만, 배병희는 이동 효율을 높이기 위해 10마력 경운기를 도입했다. 경운기에 탈곡기를 싣고 달리자 이동 시간이 절반으로 줄었다. 작업할 때는 경운기 자체 엔진으로 탈곡기를 돌렸다. 작업 반경도 섬 전체로 넓어졌다.
이어 1970년대 중반에는 충남 광천 시장에서 ‘바인더(Binder)’를 보고 과감히 구입했다. 벼를 베어 묶는 보행형 수확기로, 당시 안면도에서는 낯선 기계였다.
낫으로 며칠씩 베어야 할 논도 바인더로 밀고 나가면 그만이었다. 기계가 밑동을 벤 벼를 노끈으로 묶어 논둑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여럿이 온종일 매달려야 할 일을 기계가 한두 시간 만에 해치우자 마을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배병희는 바인더로 벼를 베어 묶고 탈곡기로 타작하는 방식을 안면도 들판에 정착시켰다.
이 바인더는 훗날 화성 독정리로 이주할 때도 가져가 새 땅을 일구는 데 요긴하게 쓰였다.
수확철에는 비가 오기 전 곡식을 털어야 해 밤낮없이 작업이 이어졌다. 보리 수확기에는 열흘 동안 쉼 없이 기계를 돌리기도 했다.
먼지와 짚가루 속에서 장정들도 지쳐 교대해야 했다. 그래도 배병희는 현장을 끝까지 지키며 작업을 이끌었다.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면 아내가 끓여낸 고깃국과 고봉밥이 일꾼들을 맞았다. 배병희는 일한 만큼 삯을 정확히 챙겨 주고 식사도 넉넉히 대접했다. 일꾼들은 그를 믿고 함께 일했다.
여러 마을을 오가며 기계를 계속 돌리다 보니 부품이 자주 닳고 고장도 잦았다. 특히 빠르게 돌아가는 크랭크축의 핵심 부품인 ‘메다르(메탈 베어링)’가 마찰열로 자주 녹아내렸다.
외딴 섬마을에서 부품을 조달하려면 며칠씩 걸렸다. 자칫 타작이 중단될 판이었다. 배병희는 숟가락 위에 납을 녹여 축 틀에 부은 뒤 매끄럽게 깎아냈다. 베어링을 현장에서 직접 만들어 수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