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만의 돌풍

1950년대 · 천수만

천수만의 돌풍 ​

수채화로 그린 돌풍 속에서 땔나무를 실은 목선의 노를 젓는 청년

전쟁이 지나간 뒤에도 섬마을 살림은 갈수록 쪼들렸다. 보릿고개마다 식량이 바닥나자, 배병희는 산과 바다로 나가 살길을 찾았다.

당시 안면도 야산에는 소나무와 잡목이 무성했다. 반면 바다 건너 육지 마을에서는 밥 짓고 방 덥힐 땔감이 턱없이 모자랐다.

배병희는 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내리며 참나무와 소나무를 베어 날랐다. 땔나무를 배에 싣고 천수만을 건너 충남 광천 장터에 내다 팔아 식구들의 양식을 마련할 생각이었다.

안면도에서 광천으로 가려면 물살 사납기로 소문난 천수만을 가로질러야 했다. 동력선은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가진 것이라곤 작은 목선 한 척과 물때에 맞춰 저어야 하는 노뿐이었다.

배가 가라앉을 듯 땔나무를 가득 싣고, 그는 물길을 가늠하며 조심스레 노를 저어 바다로 나섰다.

그러나 천수만 한가운데에 다다랐을 무렵,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난데없이 거센 돌풍이 몰아쳤다. 사나워진 파도가 목선을 집어삼킬 듯 덮쳐왔다.

높은 파도가 연거푸 들이치자 높이 쌓아둔 땔나무가 바닷물을 흠뻑 머금으며 한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배의 균형이 무너지며 차가운 바닷물이 뱃전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목선은 금방이라도 뒤집힐 듯 위태로웠다.

사방이 캄캄했고, 얼음장 같은 바닷물이 쉴 새 없이 얼굴을 후려쳤다. 집채만 한 파도가 노를 낚아채려 할 때마다 두 팔이 마비될 듯 굳어왔다.

‘여기서 배가 뒤집히면 끝이다. 내가 바다에 빠져 죽으면 집에 남은 부모님과 식구들은 어찌 되는가.’

집에서 자신만 바라보고 있을 가족들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배병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를 악물고 노를 움켜쥐었다.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파도를 가르며 노를 저었다.


수채화로 그린 죽도 갯바위에 닿아 젖은 목선을 묶고 숨을 고르는 청년 배병희

성난 파도와 사투를 벌인 끝에, 배는 천수만 한가운데 떠 있던 작은 섬 죽도(竹島)의 갯바위에 가까스로 닿았다. 뱃머리가 덜컥 바위에 부딪히며 멈추어 서자, 그는 갯바위를 끌어안고 거친 숨을 토해냈다.

그는 목선과 젖은 땔나무를 바위틈에 묶어두었다. 매서운 바닷바람 속에서 조난의 두려움을 견디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죽도의 차가운 갯바위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날 이후, 배병희는 세상의 어떤 가난과 풍파도 두렵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손으로 가족을 지켜내겠다는 다짐은 바위처럼 더욱 단단해졌다.

바람이 잦아든 뒤 그는 섬을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새벽에는 몸에 밴 소금기를 털어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지게를 지고 들판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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