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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떼인 3억
내 논을 파는 한이 있어도
17화 떼인 3억
1990년대 중반 · 독정 정미소
1980년대 후반, 독정 정미소는 전기 설비를 갖추고 창고를 새로 올렸다.
갓 찧은 쌀은 인천과 서울의 큰 도매시장으로 쉼 없이 팔려 나갔다.
겉으로는 번창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곡물 유통의 속사정은 위태로웠다.
현금 대신 몇 달 뒤에야 돈이 되는 약속어음과 가계수표가 오가던 때였다.
1990년대 중반, 3억 원은 벼 수천 가마니 값에 맞먹는 큰돈이었다.
정미소는 물론 온 집안 살림까지 한꺼번에 무너뜨릴 수 있는 액수였다.
가을 수매를 앞둔 어느 날, 날벼락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수도권의 대형 곡물 상회가 쌀값 3억 원을 치르지 못한 채 문을 닫고 사라졌다.
오랫동안 독정 정미소의 쌀을 도맡아 사 가던, 신용 좋기로 이름난 곳이었다.
불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 상회와 얽혀 있던 중간 상인들까지 줄줄이 쓰러졌다.
배병희가 받아 둔 약속어음과 가계수표는 모두 부도 처리되었다.
금고에 넣어 두었던 종이들이 하룻밤 사이에 휴짓조각이 되었다.
돈을 잃은 것도 뼈아팠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일은 더 아팠다.
형님 아우 하며 한 밥상에서 밥을 먹던 거래처였다.
땀 흘려 찧은 쌀을 서로 믿고 주고받던 사이였다.
집에서는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사무실 문을 걸어 잠그고 수화기를 붙든 채 목에 핏대를 세웠다.
배병희는 부도난 어음과 수표 뭉치를 낡은 가방에 챙겨 서울 영등포와 청량리, 인천의 양곡 골목을 누볐다.
달아난 이들의 연고지와 친척 집까지 찾아다녔다.
어디를 가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처럼 돈을 떼인 사람들의 아우성만 가득했다.
한 푼도 건질 길이 없었다.
부도로 휘청이던 정미소에 도난 사고까지 잇따랐다.
어느 캄캄한 밤, 도둑들이 정미소 뒤편 곡식 창고 벽을 뚫고 들어왔다.
쌓아 두었던 쌀 백여 가마를 싣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튿날 아침 배병희는 뻥 뚫린 창고 벽 앞에 섰다.
눈앞이 아득했다.
기막힌 일은 또 있었다.
서울 도매상에 쌀을 대러 간 날, 쌀을 실은 트럭이 통째로 사라졌다.
연쇄 부도에 창고의 쌀과 트럭까지 잃었다.
배병희는 손발이 다 묶인 처지가 되었다.
정미소 금고가 바닥을 드러냈다.
농민들에게 볏값을 치러야 할 날이 다가왔다.
흉흉한 소문을 들은 농민들이 하나둘 정미소 마당으로 찾아와 불안한 얼굴로 서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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